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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겨울 단상(斷想)

수필가 김종걸 스물 다섯 번째 이야기

 

겨울 숲 가지마다 걸린 서리, 얼어붙은 강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물, 그 위에 부서지는 달빛조차 새로운 시작의 서곡처럼 느껴지는 아침이다. 온 산과 들판 위에 흰 서리가 내려 모든 것을 덮었다. 모서리 진 감정들을 부드럽게 눌러주고, 상처의 흔적을 하얗게 덮는다. 소란과 분노를 잠시 멈추게 하고, 차분히 숨을 고르게 한다.

 

지난 1년,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감싸주는 듯 고요하다. 아침이면 서리 위에 남은 흔적을 바라보며 흘러간 시간과 남겨진 상처, 아직 피어나지 않은 새잎을 떠올린다. 지나간 일들이 남긴 흔적 속에서 배우는 것은 어떤 고통도, 어떤 허탈도 결국 아침의 서리처럼 녹아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온 대지를 조용히 덮은 서리는 기온이 이슬점 아래로 떨어지는 차갑고 구름이 없는 밤에 형성되어 숨을 고른 듯 잔디에 얼어붙는다. 잔디는 화살촉처럼 날을 세우고, 발끝만 스쳐도 서걱이는 소리가 난다. 특히 흰서리는 복사 냉각된 지면에 생긴 얇은 얼음 결정으로 참 쓸쓸하기 그지없다.

 

숲속 나무들은 야위어 마른 가지 사이로 바람이 바늘처럼 스며든다. 먼 곳에서 흘러드는 바람 소리는 오래된 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겹쳐, 잔잔한 긴장감을 만든다. 그 긴장 속에서 밤이 되면 별들이 들꽃처럼 피어난다. 별은 깊고 고요한 하늘 끝에서 어둠 속 풍경을 은은하게 적신다. 한 치의 소음도 없이 고요 속에서 흘러오는 빛의 온기가 얼어붙은 대지 위로 스며든다.

겨울이면 작은 손길이 마음을 흔든다. 기부함 속 만 원짜리 한 장, 붉은 냄비 속 지폐 몇 장이 만들어내는 순간의 무게가 잠시 세상을 조금 더 가깝게 느끼게 한다. 내려놓은 손길이 남긴 따스함은 얼어붙은 마음 사이로 조용히 스며든다. 작은 온기 하나가 얼어붙은 세계를 녹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어떤 권세에도 기대지 않고 몸으로 때운 날들이지만, 늘 정책은 한 발 어긋나고, 경제는 앓는 소리만 한다. 정치권의 소란은 여전하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목소리만 쌓아 올리는 모습, 서로를 향한 분노가 겨울의 찬 바람처럼 차갑다. 하지만 그 소음 속에서도 세상은 흐른다. 머물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가 운이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강물은 흐르기 때문에 오염되지 않기에 그렇다.

이제 벽에는 달력 한 장만 남아 있다. 얇은 종이 한 장이 삶과 맞닿아 시선을 붙든다. 몸이 성치 않은 날을 제외하면 늘 비슷한 시간이 흐른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있고, 긴장과 피로가 묻어난다. 그 틈에서도 누군가의 미소 한 줌, 스쳐 가는 눈빛 한 번이 찬 공기 속에서도 쓸쓸한 마음을 녹인다.

 

쓸쓸한 난세의 길목엔 묵은 잎들이 떨어져 나간다. 오래된 것들은 스스로 물러나야 새로운 희망이 피어나지 않겠는가. 다가오는 봄에는 어떤 새잎이 돋아날지 알 수 없지만, 그 새잎 하나가 황량한 세상에 숨결을 불어 넣었으면 좋겠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변화들이 잊힌 길 위로 서서히 번져나갔으면 좋겠다.

이제 남은 것은 작은 여운과 단단해진 마음뿐이다. 그 마음 그대로 성찰과 사유를 깊이 간직하며 스스로 다독이는 일뿐이다. 지난 1년, 사라진 것들이 남긴 공간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며, 성찰(省察)의 겨울을 보내고 있다.

 

2025년 12월 9일

김종걸

 

◀ 김 종 걸 ▶

○ 격 월간지 〈그린에세이〉 신인상으로 등단

○ 작품집

수필집 : 〈울어도 괜찮아〉(2024)

공 저 : 〈언론이 선정한 한국의 명 수필〉(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