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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뿌리

수필가 김종걸 열 여덟 번째 이야기

한식날, 고향에 간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묘를 파서 천호성지 봉안 경당에 안치하는 날이다. 길옆 양지바른 산기슭엔 성급한 산수유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고, 우뚝 서 있는 도로변 광고판에는 '늘 새봄을 맞이하는 마음으로'라는 글귀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새봄이란 단어가 일시에 파장을 일으켰지만, 고향의 가족과 천호성지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는 날이라서 편안한 마음으로 달려간다.

 

우리 3남매는 김녕김씨 충의공파의 후손이며 쇠북 종(鍾)자 돌림으로 종백(鍾白), 종걸(鍾杰)이며, 김녕김씨 충의공파 시조(始祖)인 김시흥(金時興) 선조님으로부터 27세 항렬, 쇠북 종(鍾)자에 준거한 이름이다. 여동생은 용례로 대종회 항렬과는 무관하다. 항렬의 순서로 아버지는 천(天)자, 규(圭)자로, 규(圭)자 항렬이고, 나는 종(鍾)자, 아들인 창연(昌淵)은 연(淵)자 항렬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충남 논산시 은진면 김녕김씨 집성촌에서 부여로 이전하여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에 정착한 후, 아들 셋을 두었다. 큰아들은 강경으로 이전하여 2남 3녀를 두었는데, 김녕김씨 충의공파의 후손으로 쇠북 종(鍾)자 돌림인 첫째 종원, 둘째 종선, 3녀는 대종회 항렬과는 무관한 금자, 금옥, 옥자이다. 둘째 아들은 2남을 두었는데 역시 쇠북 종(鍾)자 돌림인 종삼, 종봉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글과 한문을 배웠다. 또한 틈만 났다 하면 세보(世譜)를 꺼내 놓고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가르쳐 주셨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때부터 집안 족보에 눈뜬 셈이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종걸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뿌리를 알아야 하느니라. 너는 어디를 가든 항상 김녕 김가라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김녕 김가의 시조(始祖)인 김시흥(金時興) 선조님으로부터 27세손이며, 충의공(忠毅公)의 17세손이다. 박팽년 성삼문 등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위한 비밀결사를 구체적으로 지휘한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 선조님의 충의공파(忠毅公派) 후손이란다. 네가 조금만 더 크면 충의공인 백촌(白村) 김문기 선조님이 얼마나 위대한 어른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꼭 잊지 말거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파조(派祖) 충의공(忠毅公) 휘 문기(文起) 선조님의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이다. 1399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沃川郡伊院面白池里)에서 호조판서를 역임한 퇴휴당(退休堂) 순(順)의 손자이며, 증용 의정 관(觀)의 아들로 태어났다.

 

1426(세종 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으면서 세종 13년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예문관 검열 및 사간원 좌헌납을 거쳐 경상도 아사(亞使)와 안동부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함길도 관찰사로 나가 변경의 각 지역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는 장기 대책을 건의한 후, 실행에 옮겨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때 문종은 임종(臨終)을 맞아 김종서(金宗瑞) ‧ 민신(閔伸) ‧ 조극관(趙克寬) ‧ 김문기(金文起) 선조님에게 나이 어린 세자의 장래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명을 받은 김문기(金文起) 선조님께서는 조정의 중의(衆意)를 능히 이끌 수 있는 인물로 신망이 두터웠으며, 성실하고 강직한 인품으로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고명을 받드는 중임을 맡게 된 것이었다.

 

1453(단종 1)년 형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때는 이미 모든 권력이 수양대군으로 넘어갔으나, 이징옥(李澄玉)이 난을 일으키자, 토평서로 함길도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에 임명되어 난을 마무리 짓고 북변의 소요를 완전히 평정하였다.

 

1455년에는 공조판서 겸 도진무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의 찬위(簒位)에 의분을 느껴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과 더불어 결의하고 단종 복위를 위한 비밀결사를 구체적으로 지휘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자신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은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만약 김문기(金文起) 선조님께서 심약했더라면 수없이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과정에서 중요한 임무인 병력 동원을 맡았는데 비록 거사가 성공하지 못했지만, 동지들을 보호하려는 의기는 말할 것도 없었고, 선왕의 고명을 받들기 위한 충절은 가히 하늘에 사무쳤으니 끝내 사지가 찢기는 차열형(車裂刑)을 받아 순절하셨다.

 

훗날, 충절의 정신으로 몸을 바친 지 275년이 지난 뒤인 1731(영조 7)년에야 복권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당시 선조님께서는 절의의 상징이었으며, 효성 또한 극진했고, 학문의 깊이에서나 인품에서도 만인의 우러름을 받았다는 기록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당대의 대문호이자 석학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은 역률에 의해 참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문기(金文起) 선조님의 이름 뒤에는 반드시 ‘선생’이란 호칭을 사용하였고, 여러 사우(祠宇)에 모셔졌던 것으로도, 가히 그 인품을 짐작할 수 있겠다.

 

천호성지에 도착해서 형님 내외분과 동생 내외, 조카들과 함께 봉안 경당에서 아버님과 어머님의 유해를 모시고 부활 성당 주임 신부님의 주례로 봉안 예식을 엄숙하게 올렸다.

 

천호성지 봉안 경당은 1층에 있고, 2층은 부활 성당이다. 지하 같기도 하고 1층 같기도 한 봉안 경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성경 말씀과 더불어 어느 인디언과 한 시인의 글이 게시되어 있다. 천호성지에 갈 때마다 정독했지만 언제나 뭉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오늘은 봉안 예식이 끝난 후라서 그런지 <해 지는 곳과 해 뜨는 곳> <어제와 이제가 만나는 곳>이라는 시를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부모님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내 무덤가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숨죽은 듯/ 고요한 아침을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말 없는 새이며/ 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하략)

- 인디언의 시 <해 지는 곳에서>-

 

사랑하는 그대여/ 좀 더 가까이 귀에 대고 말하지만/ 바람, 눈, 햇빛, 비/ 그 어느 것도 나는 아니요/ 그들 속에 나는 없답니다.// (중략) 사랑하는 그대여/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거기 서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우리가 함께 했던 기쁨과 슬픔/ 위로와 상처를 불러 모아/ 연금술사처럼 모든 것을 사랑으로 비추고 있는/ 그대의 가슴속에 나는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요

- <해 뜨는 곳에서>-

 

오로지 자식만을 위하여 사셨던 부모님께서는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가족을 위하여 늘 기도해 주고 계실 거라 믿고 있다. 뒤돌아보니 부모님께 부족했던 아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부모님을 위하여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천상에서는 늘 행복하게 잘 계시라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부모님 돌아가신 지 어언 십여 년이 훌쩍 지나갔다. 지난날 부모님과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분의 산소를 이장해서 충남 논산시 성동면의 선산에 모셨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육십을 넘긴 노년의 입구에서 부모님의 묘를 파서 천호성지에 모셨으니 세월 참 빠르다.

 

부모님을 천호성지 봉안 경당에 모시게 된 경위는 살아생전에 어머님께서 묵주를 손에 들고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늘 하느님과 함께하고자 했던 우리 가족의 염원을 이룬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은 장손이신 형님께서 묘지 관리를 했었고, 파묘 후 화장까지 도맡아서 했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은 없다.

 

사실 이번 행사를 형님께서 아니 할 말로 ‘나 못한다’라고 한들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형님께서 먼저 천호성지로 옮기는 것을 제안해서 더 놀라웠고 고마웠다. 사실인즉 나로서는 그런 행사를 하고 싶어도 실천에 옮길 수가 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쪽에는 내가 연고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형님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진정한 혈족의 의미를 거듭 확인했고, 어린 시절, 어렵게 생활했던 옛 생각까지 떠올라 콧날이 시큰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내가 말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요. 형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형님께서는 나의 동의를 구한 뒤, 한식날에 맞춰 굴착기를 동원하여 파묘를 하여 부모님 유해를 화장한 후, 천호성지 봉안 경당에 모셨다. 이에 관련된 제반 비용은 부모님 상을 치르고 남겨둔 가족 공동기금을 사용했다. 이처럼 번듯한 천호성지의 봉안 경당에 부모님의 거처를 마련해 드림으로써 감개무량했다. 봉안 예식을 모두 마치고 부모님 살아생전에 자주 왔던 왕궁 저수지 옆 식당에서 예식에 참여한 모든 가족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걸로 나는 만족해야만 했다.

 

이번에 부모님의 묘소를 천호성지 봉안 경당에 모신 일은 잘한 일이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고, 무엇보다도 남의 땅이 아니기에 최소한 누군가 타의에 의해 분묘 개장을 강요받을 일도 없다. 특히 명절 때와 제사 때마다 대두되는 벌초 문제가 해결되었고, 우리 후손들이 찾아오기도 쉽다. 묘소가 산에 있을 때는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번 일로 인하여 그동안의 모든 불안과 걱정을 말끔하게 씻어낼 수 있었다.

 

우리 세대가 죽고 나면 객지로 나간 차세대의 경우 십중팔구 묘소에 온다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천호성지는 대한민국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아는 곳이라서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로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묘도 한 번에 다 해결됐다. 전에는 고향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뒤, 묘소에 찾아갔는데, 지금은 천호성지 2층 부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뒤, 1층 봉안 경당으로 자리를 옮겨 추모의 시간을 갖는다. 또한 교통까지 편리했다. 승용차든 화물차든 마음만 먹으면 천호성지 봉안 경당 앞까지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매년 성묘에 무척 신경을 써왔는데 비로소 큰 숙제 하나를 해결한 셈이었다. 훗날 내가 죽으면 반드시 부모님 계시는 천호성지 봉안 경당으로 돌아와 뼈를 묻겠다고 다짐했다.

 

해가 서너 발쯤 남아있을 무렵 모든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당초 예정보다 일찍 끝난 셈이었다. 요즘 꿈속에서조차도 뵙지 못했지만, 살아생전 나를 끔찍하게 아껴주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갑자기 뇌리에 떠올라서 심장이 멎은 듯, 마음을 가눌 수가 없어서 귀가하던 중 자동차를 갓길에 세우고 한참 동안 눈물을 쏟고 나서야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 김 종 걸 ▶

○ 격 월간지 〈그린에세이〉 신인상으로 등단

○ 작품집

수필집 : 〈울어도 괜찮아〉(2024)

공 저 : 〈언론이 선정한 한국의 명 수필〉(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