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어 있던 지표가 녹으면서 푸석해졌던 흙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땅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생명들이 다투어 밖으로 나올 채비를 서두르는 이때쯤엔 기억 하나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세월은 많이 흘러갔지만 생생하다.
그해 삼십여 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접한 사회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새로 얻은 직장생활도 녹록하지 않았고, 늘 가슴엔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갑자기 솟구치는 분노로 불현듯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고, 어느 땐 혼자서 펑펑 울고 나면 속이 시원했다. 이젠 적당히 게을러도 될 나이였고 지갑도 얄팍하지 않은데 어느 날 갑자기 불청객처럼 우울 증세가 찾아온 것이었다. 하필 그즈음, 장모님께서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 장모님께서 일 년을 살지 한 달쯤 살다 갈지 어쩌면 오늘 밤이 될지도 모른다는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말에 받아들일 수 없는 분노가 일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장모님은 의외로 초연했다.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으며, 한없이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자식 중에는 도시 근교의 요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요양원은 시설 면에서 좋은 편이나, 누구나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가는 곳이라는 관념 때문인지 쉽게 나서지는 못했다. 요양원 현장을 방문해 보니 이성적 사고가 제구실 못 하는 노구들이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목격한 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은 단념했다. 결국 장모님의 치료와 요양을 병행할 수 있는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중앙 ○○병원의 7층 병실은 이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것 같은 긴 복도 끝에 있었다. 사람 사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간호사와 요양사의 슬리퍼 소리조차도 없고, 고요 속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병실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커다란 파장 음이 날 것 같은 무거운 적막만이 가득했다. 그저 삶이라고는 존재하지 않고 죽음의 고요만을 느끼는 건 나의 편협한 선입견 때문일까.
장모님께서 입원하던 첫날, 얼핏 스쳐 간 것들이지만, 병실의 간호사와 요양사의 무표정, 그리고 상투적인 언어, 성의 없는 몸짓은 한동안 가슴에 선명하게 아픔과 분노로 남아 있다. 무엇이든 감당하기엔 너무 큰 부피가 어떤 힘에 의해서만 지탱할 수 있었기에 그랬었나. 적막함을 넘어 살벌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임종 간호 병실은 일반병실에서 질병으로 인해 거쳐야 할 단계적인 것들을 모두 거치고, 오는 곳이다.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수족이 말을 듣지 않아 남의 손을 빌려야 할 상황에 이르면 가족이란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결국 이곳으로 온다. 임종 간호 병실이 마지막 기착지인 셈이다. 하지만 인간의 수명을 다 채우고 온 사람도 있었고 한참을 더 살아도 좋을 억울한 사람도 있었다. 삶의 서사가 사라지고 식욕이란 무의식적인 본능만이 생존이란 명분을 유지하는 곳, 하여 나는 이곳을 죽음의 대기실이라 부른다. 죽지도 않은 목숨이 생로병사란 절차에 갇혀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의 열차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의 기차표는 늘 매진 상태다.
병실의 환자들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큰 고통을 참고 있었고, 단 한 번의 진통 주사(注射)에도 스르르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상실과 분노와 고통마저도 마비되고, 두려움마저도 지워진 상태에서 통증의 시간에만 잠시 힘들어했다. 아직은 끊어지지 않은 생명을 부여잡고, 표정조차 집착을 끊어낸 편안한 얼굴이었다. 하물며 같은 병실 환우의 임종에도 슬퍼하거나 아파하지도 않았다.
아내는 평일에 꼬박 밤을 새우며 병실에서 장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처제는 휴일에 장모님과 못다 한 시간을 보냈다. 늘 함께 기도하였고, 편안하게 하느님 곁에 갈 수 있도록 정성을 다했다. 결코 돌아가야 할 그 길이 두려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심어주려고 온 마음을 바쳤다. 죽음을 선고받은 장모님의 절박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지극정성으로 매주 손톱 발톱을 깎아주고 머리도 감겨드리며, 함께 기도드렸다. 늘 장모님의 천국행을 간절하게 기원했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살펴주었다. 하지만 나는 늘 반성하며 생활했다.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저쪽 세상을 천국이라 칭하며 영혼 없는 위로를 하지는 않았는지, 늘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이 많았다. 부족한 삶을 살아온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내가 한 일은 하나도 없다. 다만 매사에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자 충실히 노력했을 뿐이다. 어느 날이었던가. 병원 지인을 통하여 사위 소식을 들으면서 티끌만큼의 위로도 되지 않았을 텐데, 장모님께서는 검버섯마저 깨끗하게 핀 얼굴로 환하게 웃어 주었다고 전해왔다.
11월 중순 무렵, 병실에 다녀온 아내가 장모님하고 말도 못 하고 그냥 눈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단다. 장모님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통증이 있을 때 외에는 편안하게 잘 계시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얼굴이 야위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단다. 하지만 처제는 처음 입원했을 때보다 편안해졌다고 말한다. 당황스러웠다. 할 수 없이 병원의 지인을 통해서 상태를 확인해 보니 아내의 판단이 옳았다. 장모님께서는 입원한 지 5개월이 넘어서던 11월 하순, 코로나19가 덮치면서 누구나 떠나는 길을 따라 침묵의 행간을 헤아리다가 어둑한 병실에서 휴가를 가듯 죽음의 기차를 타고 가족의 손을 놓아버렸다.
임종 간호 병실에서의 짧은 시간은 내 삶의 중심점을 바꿔 놓았다. 그곳엔 나보다 더 암울한 사람들이 조용하게 마음을 비우고 있었고, 내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인간의 존엄한 모습인 초연함과 의연함도 돋보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부터 내 사고의 껍질은 점점 벗겨졌고, 우울이란 늪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삼 년이 흐른 요즈음, 장모님께서 홀로 기차를 타고 떠났듯, 대기실 밖에 머무는 나의 은빛 기차는 점점 노후되어 여기저기 삐걱거려 손볼 곳이 많아졌다. 또한 광범위했던 선택의 폭은 막다른 골목처럼 좁아졌다. 하지만 훗날 다가올 은빛 기차만큼은 빈들 앞에서 바라다본 일몰의 잔광처럼 고운 빛으로 다가오리라. 그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만큼은 늘 새봄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2025. 03. 09
◀ 김 종 걸 ▶
○ 격 월간지 〈그린에세이〉 신인상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그린에세이 작가회 회원.
○ 작품집
수필집 : 〈울어도 괜찮아〉(2024)
공 저 : 〈언론이 선정한 한국의 명 수필〉(2022)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수상(2021).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2019)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