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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천호성지의 가을

수필가 김종걸 6번째 이야기

아침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기온이 뚝 떨어져 한기가 느껴진다.  계절이 처서 백로를 지나면, 공기는 몰라보게 서늘해지면서 들녘은 누른빛으로 물들어 간다. 
자주 산책하러 나가다 보니 때맞추어 서 코스모스가 피어있고, 보이지 않던 고추잠자리도 홀연히 나타 난다. 
이맘때가 하늘이 가장 예쁠 때인 것 같다. 하늘은 어느새 액자 틀 안의 명화가 되어 수시로 그림을 다르게  바꿔 놓는다. 이때쯤 꼭 다녀와야 할 곳이 있다. 부모님이 계신 천호성지의 봉안 경당이다. 천호성지는 천호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 으며, 부활 성당과 봉안 경당이 함께 있다.

 

  이른 아침, 안개를 뚫고 달려간 천호성지 입구의 큰 나무들 옆에 는 붉은빛을 토해내는 꽃무릇들이 융단을 깔아놓은 듯 화려하다.  마치 가슴에 맺혔던 상처를 피멍으로 토해내듯 선홍빛 강렬한 색채로 산자락을 물들이며, 고혹적인 여인의 자태를 뽐낸다. 

 

  꽃무릇은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그리다가 제 몸을 활활 태워 피를 토하며  죽었다는 여인의 속눈썹 같은 꽃이다.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해 서로 애타게 그리워한다고 해서 상사화라고도 불리지만, 꽃무릇은 다르다. 상사화는 봄에 줄기가 먼저 나오고, 늦여름에 분홍색 꽃을 피우며, 꽃무릇은 석산화라고도 하는데, 
9월 초순쯤 꽃이 피었다가 지고 나서야 잎이 돋아난다. 꽃무릇의 연녹색 꽃대는 꽃과 어우러져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밤새 머금은 이슬방울과 긴 꽃술은 햇볕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인다. 꽃무릇은 한껏 가을빛을 받아 선홍색을  토해내며 황홀한 색채와 함께 뒤섞여 있어 
더 신비스럽다. 아, 어쩌다 이렇게 화려한 꽃들이 이곳에서 군락지를 이루게 되 었을까? 잠시 꽃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봤다. 내가 언제 한 번이 라도 꽃무릇처럼 열정적으로 불타오른 적이 있었는지.

 

  가을은 예나 지금이나 하루가 짧게 느껴진다. 
해가 짧으니 아름다운 풍경도 오래볼 수 없어 아쉽다. 하지만 천호성지 앞뜰의 들국화는 다른 꽃들에 비해 가을을 오래 붙들고 있어, 짧은 아쉬움을  달래준다. 
다른 꽃들은 서리를 맞으면 맥을 못 추는데 들국화는 
추 위에 강한 편이라 기온이 뚝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운다. 이런 강한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릴 적 그토록 강했던 부모님이  생각나서 가슴에 찡한 여운이 남는다.

 

  천호성지의 모퉁이에 억새가 바람에 흔들린다. 표표히 나부끼는  하얀 억새꽃을 보면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억새는 고즈넉할 뿐만  아니라 쓸쓸하지 않은 시절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들꽃이다. 특히 석양을 등지고 
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저무는 역광에 윤택한 빛깔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억새의 도열이 마치 사열관처럼  맞이한다. 이젠 천호성지의 모퉁이가 억새의 자리처럼 당연하게  느껴진다.

 

  가을 아침, 선홍빛 그리움을 가슴 한편에 묻고 세월을 비켜, 먼저 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천상에서의 축복과 은총을 간구하는  기도를 바친다. 오늘도 천호성지 입구의 꽃무릇과 앞뜰의 들국화,  그리고 모퉁이에서 사운 대던 억새와 함께 천호성지의 가을이 눈에 선하다.

 

수필가 김종걸 

 

격 월간지 〈그린에세이〉 신인상으로 등단.

현) 한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그린에세이 작가회 회원.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후, 경정(警正)으로 퇴직

 

<수상>

2014년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행정안전부 장관상 수상.

2016년 제17회, 2018년 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경찰청장상 수상.

2021년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2019년 대통령 녹조근정 훈장 수상 및 국무총리 표창 수상.

프로필 사진
박상희 기자

안녕하세요
미담플러스 대표, 편집장 박상희 기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