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와 ASML이 화성에 건립하기로 했던 연구개발 센터의 건립계획이 취소될 가능성이 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고 있다. 반도체 연구개발의 선도적 기관으로서 많은 역할이 기대되었으나, 만약 현재 보도되는 대로 연구개발 센터의 건립 취소나 다른 지역으로의 이전이 확정된다면 지역의 입장에서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화성시는 물론 지금도 기업 및 투자를 유치할 기반이 튼튼한 편이며, 그만큼 새로운 가능성은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에 많은 비중을 두고 의존하는 이상 인프라의 입지 변화에 늘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반도체와 같은 과학기술은 지역에 국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공장이나 연구개발 센터의 입지가 꼭 특정 도시일 필요는 없다. 이러한 ‘초지역성’은 실제로 과학기술의 초국가적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각 지역의 입장에서는 과학기술 인프라가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는 불안을 늘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의 창조성을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소프트파워’로서의 인문 분야, 과학기술과 함께 지역에 뿌리내리는 ‘지역형 산업’으로서의 인문 분야를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인문학은 지금과 같은 보급형 정책으로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 얼마 전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이 군의관 후보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조선반도는 입만 터는 문과 X들이 해먹는 나라”라는 식의 발언을 해 논란이 있었다. 어떤 절실함을 가지고 말했는지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도대체 인문학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본래 인문학은 현장형이며 맞춤형이었다. 오랫동안 사학은 더 나은 정치를 위한 지침이 되었으며, 문학은 당대 사람들의 가장 진솔한 고백이 되었고, 철학은 시민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되었다. 지금의 인문학은, 관련 정책은 어떠한가. 마치 통조림을 생산하듯 콘텐츠를 양산하고 일괄적으로 진열하듯 공급하고 있다. 행정의 특성상 보편 다수를 위한 보급형 정책이 많을 수밖에 없는 점은 이해한다. 하지만 모든 정책이 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미 복지정책은 맞춤형 복지로 향하고 있다. 인문학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대량공급식 인문학 강좌를 넘어 개인의 삶과 지역의 현안에 어떻게 ‘인문학적 응용과 실천’을 할지 정책을 준비해야 한다.
지역의 풀뿌리에서부터 인문학적 연결고리를 충실히 구축하고 이어가야 한다. 지금의 주민자치회나 마을공동체, 지역 사회단체에서 축적되는 주민 삶의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관리되고 응용되고 있는지 돌아볼 때이다. 주민의 소중한 이야기가 현재 행정의 예산지원 체계에 맞춰 한 권의 책자나 한두 개 소품 속에만 남고 행사나 회식 자리에서 맴돌다 휘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본질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주민의 이야기로 다음 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며 나아가 도시의 미래까지도 설계해 볼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필자가 애정을 갖고 참여하는 동탄 홍사용 문화거리 활성화 주민협의체에서는 지난 5년 가까운 시간의 활동 속에서 나온 주민 삶의 이야기를 이제는 종합하고 새롭게 파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흐르고 있는 콘텐츠를 지역사회가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필자의 의견도 수렴되었다. 주민이 남긴 작품 하나, 메시지 하나까지도 다시 살펴보고자 노력할 것이다.
지역에서 과학기술이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이 커야 하며, 과학기술 분야가 어려울 때에도 인문 분야가 뒷받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양, 취미 강좌 수준의 인문학을 넘어서야 한다. 필자가 대표로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마을의 인문학>은 예전부터 정기적으로 시민과 함께하는 인문학적 소통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작품 감상과 강의도 있지만, 참여자 각자가 일상에서 그 내용을 어떻게 접목하고 응용할 것인지를 함께 깊이 논의한다. 필자도 그 자리에서 인문학의 힘을 매 순간 체험하고 있다. 이제, 인문학을 낭만과 그리움의 자리에서 창조와 도전의 자리로 옮겨와야 할 때이다. 도시와 사람의 도약도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인문학적 선진국을 향한 따뜻한 정면돌파, 백현빈]
- <마을의 인문학> 대표
- 서울대학교 박사과정 수료(정치학전공)
- 서울대학교 석사 졸업(행정대학원 행정학석사)
- 화성특례시 제6기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전체위원장
- 서울의소리 "백현빈의 정면돌파" 앵커 역임
- 화성특례시 문화자치 참여시민협의체 공동운영위원장
- 화성시 제2기 청년정책위원회 위원장
- 경기도 주민참여예산위원회 5, 6기 문광복지분과 위원
- 경기도교육청 주민참여예산자문위원회 연구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