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겨울, 사유(思惟)가 머문 자리에서

  • 등록 2025.11.09 15:36:51
크게보기

- 화성 문학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
수필가 김종걸

 

초겨울의 바람은 언제나 걸음을 멈춰 세운다. 바람 끝이 차가워지면 비로소 한 해를 되돌아볼 마음의 자리가 생긴다. 초겨울의 문턱에서 열린 화성 문학 출판기념회가 그러했다. 아직 완전히 겨울이라 부르기엔 이르지만, 가을의 여운은 수그러들고, 공기 속엔 묘한 정적이 깃들어 있다. 오늘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 해의 결실을 나누었다.

 

문학인의 자리는 언제나 따뜻하다. 화성 문학지에서의 종이 냄새와 잉크의 향, 낭송되는 시의 울림,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언어의 온기가 그 어떤 축제보다 부드럽다. 문학이란 결국 사람의 온도를 회복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화성 문학의 회원들이 만들어가는 이 작은 문학의 장은 화려하진 않다. 하지만 오늘 류순자 님의 진행 속에는 각자의 삶을 진실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 그 마음의 온기는 문학의 본질이자 인간의 본성에 닿아 있었다.

 

행사는 최기봉 님의 하모니카 선율로 문을 열었다. 소박한 악기였지만, 그 소리는 오래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음표마다 묻어나는 숨결 속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다. 연주자의 눈빛은 반짝였고, 그가 파크골프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깨달음이 스쳤다. 행복이란 어쩌면 저런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모니카를 부는 손끝, 골프채를 쥐는 손끝, 그리고 그 사이의 조용한 미소. ‘삶의 행복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순간의 평화로움에 깃든다.’

 

문학도 그렇다. 글을 쓴다는 일은 자신과 마주 보는 행위이자 살아 있음의 증거를 남기는 일이다. 사유 없는 삶은 방향을 잃은 배와 같고, 문학은 그 배를 이끄는 등대와 같다. 무대에 오른 유지선 님이 말했다. “책을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쓸 수 있습니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 행위가 아니다. 타인의 삶과 생각을 통과해 자신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책 속의 세계는 언제나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고, 동시에 자유롭게 한다. “사유(思惟)가 깊어질수록 글에는 생명이 깃든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에 관한 문제다. ‘문학은 결국 내면의 침묵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글을 쓴다는 행위는 더욱 절실해진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윽고 남윤희 님과 이자영 님의 시 낭송이 이어졌다. 단상에 오른 두 분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가을을, 사랑을, 인생을 노래했다. 그 음성들은 놀랍도록 맑았다. 어떤 시는 바람 같았고, 또 다른 시는 눈물 같았다. 낭송을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을처럼 맑은 목소리가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시가 사람의 마음을 닦는다는 말이 있다. 오늘, 그 말이 실감 났다. 낭송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마음이 고요했다.

 

언어가 내면의 소음을 잠재우는 순간이었다. 사람의 목소리에는 삶의 진실이 묻어난다. 그것은 문장보다 강한 울림을 지닌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일이며, 시를 낭송한다는 것은 그 목소리를 세상에 건네는 일이다. 오늘의 무대 위에서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숭고한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행사의 마지막 순서가 끝나자, 회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오랜 우정과 연대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문학은 개인의 예술인 동시에 공동체의 힘으로 자라난다. 문학이란 결국 사람을 잇는 일이다.

 

세상이 점점 개인화되고,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시대에 문학은 여전히 마음과 마음을 연결한다. 글을 통해, 낭송을 통해 혹은 한 권의 책을 매개로 하여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그것이 문학의 가장 위대한 역할이다. 오늘, 문우들과 함께한 그 짧은 시간은 진심으로 행복했다. 문학이 우리를 하나로 묶고, 언어가 우리를 다시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현장이었다.

 

돌아오는 길, 초겨울의 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러나 그 바람은 차갑지 않았다. 하모니카의 여운이 귓가에 남았고, 가을의 마지막 빛이 저녁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나 자신에게 묻는다. “문학은 왜 필요한가.” 그 대답은 이미 마음속에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존재의 증명이자, 삶의 고백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간은 여전히 느끼고, 생각하며, 기록한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이며, 문학이 살아 있는 이유다.

 

문학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었다. 초겨울의 길목에서 바람 소리에 잠시 마음이 멈추는 그 순간, 사람의 미소 속에서, 한 줄의 시 속에서, 그리고 서로의 손을 맞잡는 따스함 속에 있었다. 오늘의 화성 문학 출판기념회는 단지 한 행사가 아니었다. 한 해의 끝에서 인간의 마음이 다시 연결되는 ‘작은 축제’였다고나 할까.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면, 초겨울의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든다. 책상 앞에 앉아 오늘의 풍경을 글로 옮긴다. 하모니카의 울림, 시 낭송의 맑은 목소리, 문우들의 웃음, 그리고 마음속에 남은 따스한 여운까지. 삶은 결국 기억의 문장들로 엮여 있다. 그 문장 하나하나가 모여 한 사람의 역사가 된다. 문학은 그 역사를 사랑스럽게, 존엄하게 남겨주는 유일한 언어다. 초겨울의 문턱에서 또 한 줄의 사유(思惟)가 태어난다. 그 생각 속에서 인간은 다시 따뜻해진다.

 

 

수필가 김종걸

2025. 11. 09

기자
Copyright @주식회사 미담그룹. All rights reserved.

법인명 : 주식회사 미담그룹 주소 :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1068 리더스프라자 607호 등록번호: 경기, 아 53641 | 등록일 : 2023년 6월 5일 , 010 8911 4513 발행인 : 박상희| 편집인 : 박상희 지면 구독 1년 10만, 농협 355-0085-8585-63 주식회사 미담그룹 입금 후 문자로 주소 전송시 구독 완료 문의 desk@midamplus.com Copyright @미담플러스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