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가을바람이 붙어온다.
서늘하면서도 맑은 기운이 폐 끝까지 스며든다. 이 아침, 가을이 노래를 부르며 조용히 다가와 마음을 흔든다. 시간은 낙엽처럼 흘러가고, 계절은 잠시 머물다 또 다른 문턱을 향해 걸어간다. 특별히 해놓은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놓친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도 문득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마음이 저릿할 때가 있다.
누구나 그러하듯 안정된 삶의 울타리 안에서 자식들이 건강히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보람을 느낀다. 그것이면 족하다고 자신을 스스로 다독인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예고 없이 굽이친다. 가까운 지인의 부친이 치매로 세월을 견디는 모습을 보며,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인간의 유한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칠 년 전, 그날따라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던 가을밤이었다.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채로 지인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오후 일곱 시쯤 집을 나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간절한 눈빛 속에는 두려움과 절망이 교차했다. 부친의 인상착의와 치매 증상,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는 사실을 급히 확인하고, 전 직원과 함께 인근 농로와 하천, 마을 구석구석을 샅샅이 수색했다. 새벽이 깊어져 갈수록 빗줄기는 굵어지고, 손전등 불빛은 안개 속으로 자꾸 사라졌다. 새벽 다섯 시가 지나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의 얼굴엔 피로와 초조가 엉켜 있었다.
아침 식사를 서둘러 마친 뒤,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전 열 시, 한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울렸다. “발견했습니다!” 주거지에서 약 4킬로미터 떨어진 농로 위, 노인은 자전거를 끌며 비를 맞고 있었다. 허공을 향한 눈빛은 멍했고, 발걸음은 느리지만 분명 생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지인은 노 부친을 끌어안은 채 울었다.
“이 비 오는 날에도 이렇게 애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속에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절망 끝에 닿은 인간의 감사가 있었다.
사소한 일들로 세상은 굴러간다. 그러나 그 사소함 속에 사람다움이 깃든다. 젊은 날의 내 마음을 두드렸던 것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었다.
비 내리던 그 밤, 젖은 신발의 무게보다 오래 남은 것은 ‘함께 했다는 기억’이었다.
칠 년이 흘렀다. 지인의 부친은 여전히 치매와 싸우고 있다.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기억이 지워지고, 가족들은 날마다 처음처럼 살아간다.
“인생은 연장전이 없잖아요. 그래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죠.”
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삶은 이미 하나의 기도였다. 퇴근길, 문득 생각했다. ‘내가 만약에 굴곡진 삶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무채색의 평범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수많은 사람의 사연 속에서 살아 있는 ‘감정의 온기’를 배운다. 그것이 내가 이 일을 계속 붙잡고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오랜만에 그 지인의 가족을 만났다. 서로의 눈빛에 스며든 세월의 무게를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가장 큰 효도 아닐까요.”
그는 잠시 미소를 짓더니, 노을빛처럼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을바람이 옷깃을 스쳤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낙엽이 쓸쓸히 흩날렸다.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오늘 하루를 진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태어나는 생명보다, 사라져가는 기억이 더 많은 계절. 그러나 여전히 희망의 불씨를 믿는다. 늙음과 병마의 어둠 속에서도,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음을.
그날의 농로, 그날의 비, 그리고 아직도 꺼지지 않은 마음의 등불 하나. 그 등불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밝혀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2025. 10. 29.
그날을 기억하며
◀ 김 종 걸 ▶
○ 격 월간지 〈그린에세이〉 신인상으로 등단
○ 작품집
수필집 : 〈울어도 괜찮아〉(2024)
공 저 : 〈언론이 선정한 한국의 명 수필〉(2022)
